그런데, 무슨 사이예요?
며칠 전, 형선이 좋아하는 옷집에 갔다. 그 가게는 우리 집에서 차로 한 시간쯤 떨어진 구좌읍에 있는 빈티지숍인데, 좋은 소재와 독특한 디자인의 옷이 많아 한 번 가면 꼭 오래 머물게 되는 곳이다. 대체 이걸 누가 입지 싶은 것도 있지만, 형선은 그런 것들 사이에서 기어코 자기 옷을 찾아낸다. 그날도 형선은 매장을 한참 둘러보다가 마음에 드는 옷 두어 벌을 골라 탈의실로 들어갔다. 나는 가게 한 켠에 앉아 탈의실 너머 형선과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때, 이제 막 우리와 안면을 트기 시작한 옷집 사장님이 내게 물었다.
“그런데, 두 분은 무슨 사이예요?”
나는 농담 섞인 목소리로 탈의실 쪽을 향해 외쳤다.
“형선아, 사장님이 우리 무슨 사이냬ㅡ”
잠깐의 정적을 뒤로 하고, 형선이 커튼을 젖히며 말했다.
“제 애인이에요. 근데 정원아, 이 옷 좀 길지 않아?”
옷소매를 만지작거리는 형선의 대답에는 약간의 어색함이 묻어 있었다. 형선의 대답을 들은 옷집 사장님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둘이 보기 좋다는 말도 덧붙이며, 별일 아니라는 듯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형선은 자신의 성 지향성을 드러내는 일에 신중한 사람이다. 아주 어릴 적부터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온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탓에 동성애는 죄악이라는 상식을 주입받으며 컸다. 게다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동성애는 지금보다 훨씬 낯선 것이었고, 사회는 그것을 몹시 경계하고 배제하는 분위기였다. 그런 환경에서 어린 형선은 스스로를 의심하며, 오랫동안 자신의 한 부분을 숨기고 살아야 했다. 나는 오랫동안 이성애자로 분류된 삶을 살아왔고, 한때는 결혼 생활도 했었기 때문에 이상하고도 당연하게 내 정체성에 대해 깊이 고민해본 적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나를 무심히 비껴 지나간 그 질문은, 형선을 끈질기게 추궁해왔다. 지금은 세상이 많이 달라졌고, 형선 역시 가능한 한 편안하게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조심스러운 마음이 남아 있기에 어딘가 삐걱거리는 대답이 나왔던 것이다.
그 날 옷집 사장님의 반응을 마주한 나는 괜시리 마음이 놓였다. 심지어 그 질문이 반갑기까지 했다. 우리는 때로 침묵 속에서 많은 것을 듣는다. 머리가 짧은 여자와 그 옆에 늘 붙어 다니는 또 한 명의 여자. 생각해 보니 나 역시 그런 조합의 사람들을 볼 때면, 그 둘의 관계에 대해 물음표를 가지곤 했다. 이제는 내가 그 물음표의 대상이 되는 일에 웬만큼 익숙해졌지만, 물음표를 띄운 채 침묵하는 공기는 여전히 답답하다. 나는 정중한 침묵보다는 솔직한 질문이 훨씬 더 편한 사람이다. 하지만 상대가 묻지도 않았는데 내가 먼저 나서서 “저 게이예요”라고 말하는 것도 웃기는 노릇이고, 차라리 누가 먼저 물어봐 주는 편이 반가운 것이다.
나를 비롯한 세상 사람들은 관계에 이름표를 붙이고 살아간다. 애인, 부부, 친구, 룸메이트, 동료. 어떤 관계에 딱 맞는 이름이 하나 있으면 마음이 놓이는 걸까. 아니면, 이름을 붙이지 못하는 관계는 그 자체로 성립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걸까. 나는 언제부터인가 관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이름표 중 하나를 골라 설명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을 고르는 순간부터 머릿속이 고장 나기 시작한다. 말하다 보면 어딘가 모자라기도 하고, 때로는 넘치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주 별로이진 않지만 딱 맞지도 않는, 그러니까 내가 관계에 붙이려는 이름표는 형선이 탈의실에서 입고 나온 그 어정쩡하게 긴 옷과 비슷하다. 그렇게 무난한 이름표를 달지 못한 채로 머무는 관계는 설명하기만 어려운 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선 존재 자체를 증명하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나는 종종 먼 훗날의 형선과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보곤 하는데, 그 상상은 대체로 병원 복도에서 시작된다. 형선은 병원 침대에 누워 있고, 나는 담당 간호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물론 생물학적 나이나 생활 습관을 고려하면 병상에 누워 있을 확률이 더 높은 쪽은 나일 테지만, 드라마의 주인공이 나이기 때문에 일단은 내가 살아남는 쪽으로 설정해 두도록 하겠다. 어쨌든,) 그 장면을 떠올리면 나는 늘 보호자 서명란 앞에 멈춰 서 있다. 우리가 평생 함께 살며, 서로의 인생을 돌보는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종이 한 장짜리 보호자 동의서 위에서는 아무 사이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린다. 그 순간을 상상하는 나의 가슴 한편은 서늘하다.
병원, 보험, 유산, 주거, 육아처럼 보호자가 반드시 필요한 제도는 관계의 정의를 전제로 작동한다. 누군가의 배우자, 자녀, 부모나 법정 후견인이라는 이름표가 있어야 문이 열리고 서류에 도장이 찍힌다. 정의되지 못한 관계는 제도의 바깥에 놓인다. 그리고 그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당신들은 서로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고 있습니까?’가 아니라 ‘법적으로 어떤 관계입니까?’를 묻는다. 그 질문에 대답할 말이 없다는 사실은, 그동안 우리가 나눈 모든 돌봄과 애정을 증명할 방법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낭만적인 구석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제도란 놈을 흘겨보면서도, 그 안에 끼어들 궁리를 하는 우리는 우스갯소리처럼 말한다.
“1살이라도 많은 사람이 입양하면 된다더라.”
“바다 건너 어떤 나라에선 동성혼이 합법이라던데.”
웃기고 씁쓸한 이야기다. 하지만 형선과 나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저녁 식사 메뉴를 고르고, TV를 보며 뒹굴거리다 함께 잠자리에 든다. 어쩌면 관계란, 반드시 명확한 이름표를 필요로 하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매일 우리만의 방식으로 확인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