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말랭이의 막글 모음집

지상 최대의 난제

저놈의 재단기는 진작에 내다 버려야 했다. 망가지려면 시원하게 망가지든가. 됐다 안 됐다 하면서 내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다. 버리자니 아깝고, 고치자니 귀찮고, 어쩌면 이런 상태로 몇 달간 저 고철 덩어리 옆에서 손으로 엽서를 자르고 있는 내가 제일 큰 문제일지도 모른다. 오늘만 해도 벌써 네 시간 동안 엽서를 썰고 있다. 코 앞으로 다가온 엽서 납품일을 맞추기 위해 나는 팔자에도 없는 근면성실 중이다. 담배 한 대 태우고 싶지만 참아야 한다. 지금 일어서면 다시 책상 앞에 앉기 싫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인내심이 바닥을 긁고 있는데 형선이 슬쩍 나타난다. 그리고 아주 능숙하게 잘못된 손놀림으로 종이 한 뭉치를 집어 다목적 용지 함에 넣는다. 또 그 방향이다.

“아니, 그거 아닌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인쇄기가 돌아간다. 형선은 이런 순간엔 참 빠르다. 이 아이에겐 실수할 때만 작동하는 신경 체계가 있는 모양이다. 이쯤 되면 일부러 이러는 건지도 모르겠다.

“형선아, 또 거꾸로 넣었잖아.”

형선이 조금 당황한 얼굴로 말한다.

“아, 맞다…”

또 그놈의 '아 맞다'다.

“…아 맞다??? 아 맞다??? 저기요, 혹시 돈이 썩어나시나요??”

방금 형선이 용지 함에 넣은 건 엽서 앞면을 인쇄해 둔 종이다. 이제 뒷면을 찍어야 하는데, 용지의 방향을 잘못 넣으면 앞면 위에 뒷면이 겹쳐 찍힌다. 일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린다는 뜻이다. 개업이래 형선이 종이를 몇 장 버렸는지 세지 않게 된 건 이미 오래 전이다. 종잇값으로 트집을 잡긴 했지만, 그보다 더 아까운 건 시간이다. 못 쓰게 된 엽서를 다시 인쇄하려면 나머지 일이 밀리고, 밀린 일은 결국 또 내 손으로 수습해야 한다. 일찍 퇴근하긴 글렀다. 단전에서부터 화가 밀려온다.

“내가 이거 한두 번 말했냐. 앞면 인쇄된 부분이 천장을 바라봐야 한다고. 못 외우겠으면 그냥 종이에 써서 붙여놔.”

내 말을 들은 형선의 입이 서서히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아니… 화가 날 순 있는데… 좀 좋게 말할 수 없어?”

나는 정말 진지하게 궁금하다. 화를 좋게 내라니, 이건 대체 무슨 말일까. 칼로 찌르되, 아프지 않게? 불을 지르되, 따뜻하게? 국어사전을 찾아보자.

[화(怒): 몹시 못마땅하거나 언짢아서 나는 성]

그래, 난 지금 딱 그 상태다. 근데 이걸 좋게 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죄송하지만, 당신의 반복되는 실수가 조금 속상하네요.” 이런 식으로 말해야 하는 건가? 기분 나빠서 생기는 게 화인데, 그걸 좋게 표현하라는 건 나에겐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말이다. 아무래도 형선과 나의 사전은 서로 다른 언어로 쓰여 있는 것 같다. 지금 당장 나가서 아무나 잡고 묻고 싶다. 진짜로 아는 사람이 있다면 알려줬으면 좋겠다.

기분 좋게 화내는 법, 아시는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