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 아침, 의식의 흐름
잠자리에 든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눈이 떠져 짜증스러운 새벽이다. 베개 밑을 뒤적이며 휴대전화를 찾지만 손에 걸리는 것이 없다. 어젯밤 분명 여기에 두고 잔 것 같은데 말이다. 시선을 돌리자 침대 아래로 사정없이 내쳐진, 다소 쓸쓸해 보이기까지 하는 직사각형의 물체가 눈에 들어온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어림이 없어 몸을 반쯤 침대 밖으로 내밀자 휴대전화 끄트머리가 간신히 손가락에 닿는다. 검지와 중지를 꼬물거려 기어이 전화기를 손에 넣고 나니 어느새 발끝까지 쭉 힘이 들어가 있다. 종아리 근육이 당긴다. 그냥 일어나서 주우면 될 것을. 침대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 이토록 용을 쓰는 내 모습이 우습다. 새어 나온 웃음이 흐리멍덩하게 남아 있던 잠을 완전히 쫓아내 버린다. 휴대전화 화면 속 숫자는 일곱 시에 가까워져 있다. 머리맡을 슬쩍 올려다보니 창문에 어스름한 퍼런 빛이 어린다.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 탓에 태양마저 움츠러든 몸을 일으키기가 녹록지 않은가 보다. 권장 수면 시간을 족히 채웠는데도 유난히 일찍 눈을 뜬 기분이 드는 건 전기장판이 주는 노곤한 잠을 좀 더 즐기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전기장판이라… 생각해 보니 등짝이 미적지근하다. 온도 조절기를 보니 전원이 꺼져 있다. 자동 꺼짐인가 뭔가, 그놈의 기능! 기능이 문제다. 이럴 땐 기술의 발달이 인간에게 반드시 이로운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옆자리의 형선은 아직 한밤중이다. 밀가루 반죽처럼 늘어진 얼굴을 하고선 연신 허푸 거리며 코를 골고 있다. 꿈에서 수영이라도 하는 걸까. 아니면 과호흡이 온 것일까. 순간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형선을 흔들어 깨운다. 벌떡 일어나 입가에 침을 닦는 걸 보니 괜한 걱정을 한 것 같다. '아침형선'은 밀가루 반죽처럼 생겼다. 형선은 이 표현을 싫어하지만 이것은 귀엽다는 뜻이기 때문에 곧 칭찬이므로 나는 기어이 말로 뱉고 만다. 나의 밀가루 반죽은 일어난 지 십 분도 되지 않아 산책을 하겠다며 주섬주섬 옷을 껴입는다. 뒤통수에 까치집은 산책에서 만날 새들을 위해 준비한 모양이다. 형선은 배가 고프다는 내 말에 겉옷을 벗어 내려놓고 냉장고에서 사과 하나를 꺼내 씻는다. 나는 어리숙하고 착한 이 여자가 불쌍하다. 일 년 전부터 백수로 놀고먹는 나를 건사하느라 수고가 많을 것임에도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는 이 여자는 과연 전생에 무슨 죄를 지은 것인지 상상해 본다. 나라를 팔아먹었거나, 부모를 죽인 원수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조금 덜 불쌍하다. 형선은 숭덩숭덩 썰어낸 사과 한 접시를 침대 협탁에 올려놓고 우리가 사는 빌라 옆 작은 공원으로 산책을 나선다. 사과를 한 개 집어 깨무니 입안이 까끌까끌하다. 언젠가부터 단단한 음식을 먹는 게 사나워졌다. 요 근래 잇몸이 눈에 띄게 약해진 탓인 듯하다. 하지만 병원에 가는 것이 무서워 잇몸 질환 전용 치약으로 버티는 중인 나는 올해 서른일곱 살을 먹은 어엿한 청년이다. 물론 그 사실이 딱히 자랑스럽지만은 않다. 이십 대 후반엔 마흔이 되면 제법 많은 걸 이루며 살 줄 알았는데.. 지금처럼 변변한 직장도 없이 여섯 살 어린 여자 친구의 등골이나 빼먹는 모습은 꿈에도 본 적이 없다. 마음먹은 대로 흐르지 못한 인생사를 돌아보니 갑자기 담배가 땡긴다. 나는 서재로 기어 나와 창문을 열고 담배 한 모금을 빨아들인다. 밤새 정화된 몸속에 다시 니코틴을 집어 넣으니 머리가 띵하다. 누군가 흡연에 대해 호흡 명상과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이 참말이다.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반복하니 건강하지 못한 이 행위가 너무도 건강하게 느껴진다. 잠시 뒤면 산책을 마치고 돌아올 비흡연자의 타박이 신경 쓰인 나는 창밖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허연 담배 연기를 내뱉는다. 이층에서 내려다본 거리엔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변변한 직장 어쩌고 했던 나는 직장이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마음은 참으로 간사하다. 언제 나타났는지 노란 봉고차 한 대가 굴러 와 건너편 빌라 앞에 멈춰 선다. 아빠로 추정되는 남자의 손을 잡고 나타난 꼬마애 둘이 노란차에 올라타고 남자는 차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손을 흔든다. 아, 간밤에 나는 꿈을 꿨다. 나는 꿈속에서 꼬마애 두 명을 만났다. 조금 전 그 애들은 아니고 네다섯 살 무렵의 모습으로 돌아간 나의 딸과 아들을 만난 것이다. 꿈속의 나는 지금 우리가 떨어져 산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듯 했다. 화려한 옷차림을 한 내 모습. 나는 과거의 여느 날과 같이 밤늦게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데리러 갔다. 늦은 시간까지 어린이집에 남아있을 아이들 생각에 마음이 급해진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린이집 문을 열자 두 아이는 왜 이제 왔냐며 내 품으로 달려와 안겼다. 아이들을 끌어안으니 기다렸다는 듯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순간 파도에 모래가 휩쓸리듯 내 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