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말랭이의 막글 모음집

이것은 스팸메일이 아닙니다.

나는 쓸데없는 정보를 수집한다. 책을 읽거나 대화를 나누다 무심코 튀어나온 한마디가 무언가 익숙한 느낌이 들거나 오히려 새삼스럽게 느껴질 때,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곧바로 검색창을 열어 그것에 얽힌 자초지종을 캐내기 시작한다. 내 책은 다음 장으로 향할 생각이 없고, 대화는 이미 다른 주제로 흘러가 버리기 일쑤다. 그러나 그 덕에 나는 쓸데없는 정보들을 제법 많이 모아두었다.

예를 들어 나이키 로고 ‘스우시(Swoosh)가 몇 달러에 팔렸는지 같은, 알아서 어디다 쓰나 싶은 것들 말이다. 나이키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상징이 된 스우시는 1971년, 나이키가 아직‘블루 리본 스포츠’라는 이름이던 시절에 그래픽디자인 전공 대학원생이었던 캐럴린 데이비슨이 제작했다. 데이비슨은 그리스 신화 속 승리의 여신‘니케(Nike)’의 날개에서 영감을 받아 스우시의 완벽한 곡선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이 로고를 고작 35달러를 받고 나이키에 넘겼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200달러, 그러니까 30만 원이 채 안 되는 금액이다. 이후 스우시는 명실상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브랜드 로고 반열에 올랐고, 나이키는 그녀의 공로에 감사하며 로고 모양의 다이아몬드 반지와 자사 주식 500주를 선물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로고 디자이너가 헐값에 로고를 넘긴 뒤 땅을 치고 후회하는 걸 생각하면, 그녀는 나름의 대우를 받은 셈이다.

‘스팸메일’이라는 단어의 유래도 있다. 이 단어는 통조림 햄 브랜드 ‘SPAM’에서 비롯되었다. 스팸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투식량으로 대량 보급되면서 유럽과 미국 전역에 퍼졌다. 유통기한이 길고 값이 싸다는 장점 때문에, 정부 입장에서는 전쟁의 허기를 달래기에 스팸만 한 선택지가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먹여도 너무 많이 먹였다는 데 있었다. 사람들은 매 끼니 등장하는 스팸에 질려버렸고, 스팸은 점점 ‘억지로 먹는 음식’으로 인식되었다. 1970년대 영국의 코미디 그룹 ‘몬티 파이선’은 이를 풍자한 콩트를 방송했는데, 스팸을 먹기 싫어 몸부림치는 부부와, 스팸 없는 메뉴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음식점 주인의 대화가 큰 화제를 낳았다. 이후 사람들은 ‘내가 원하지 않는데 자꾸 등장하는 것’을 일컫는 말로 스팸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스팸메일’이라는 단어까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통조림 햄은 한국전쟁으로 건너와 또 다른 단어를 탄생시켰다. 전쟁 중, 미군 부대 인근 주민들이 햄, 소시지, 스팸 같은 미군 보급품을 구해 김치와 고추장을 넣고 끓여 먹기 시작했고, 이 음식의 이름을 ‘군부대 찌개’, 즉 ‘부대찌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를 거쳐 만들어진 두 단어는, 같은 햄의 궤적을 공유하고 있다.

비틀스의 〈Hey Jude〉에 얽힌 사연도 흥미롭다. 이 노래는 비틀스 멤버 폴 매카트니가 존 레논의 아들 줄리언에게 바치는 곡이다. 원래 제목은 ‘Hey Jules’였으나, 발음하기 편하게 바꾸어 ‘Hey Jude’가 되었다. 1968년, 존 레논은 오노 요코와의 불륜으로 본처 신시아 레논과 이혼했고, 당시 줄리언의 나이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 매카트니는 아이가 받을 상처를 염려하며 줄리언을 만나러 가던 차 안에서 이 노래를 만들었는데, 정작 이 노래를 들은 존 레논은 자신과 요코의 관계를 축복하기 위한 곡이라고 오해했다고 한다. 나중에야 진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 사실을 썩 탐탁지 않게 여겼고, 매카트니는 〈Hey Jude〉를 부를 때면 괜히 존 레논의 눈치를 봐야 했다는 후문이 전해진다. 이런 이야기를 알고 나면, 익숙했던 노래가 어쩐지 낯설게 들린다.

내가 제주에 와서 처음 터를 잡은 동네 '애월읍'에 얽힌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애월(涯月)’은 물가 ‘애(涯)’에 달 ‘월(月)’ 자를 쓴다. 물가에 떠 있는 달이라는 뜻이다. 실제 애월의 해안 지형이 반달처럼 굽어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나는 아직도 내가 물가에 뜬 달 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 봄철마다 고사리를 꺾으러 다니다 채집한 정보도 있다. ‘고사리’라는 이름은 ‘구살이’에서 왔다는 설인데, 이 ‘구살이’라는 말은 '아홉 번 산다’라는 뜻이란다. 실제로 고사리는 한 해에 몇 번이고 꺾인 자리에서 다시 새순을 낸다. 한 번 사는 인생도 만만치 않은데, 아홉 번이라니…. 나는 고사리를 꺾을 때마다 약간의 존경심을 품는다.

이런 얘기를 늘어놓다 보면 끊임없이 말하고 싶은 욕망이 밀려오지만, 스팸과 같은 처지가 되지 않기 위해 이쯤에서 멈추도록 하겠다. 어쨌거나, 이런 잡다한 정보들을 모으다 보면 묘한 안도감이 생긴다. 어떤 것이 완전히 이해될 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내가 모든 것을 조율할 수 있다는 착각이 든다. 한 가지 의아한 것은, 이런 내가 가장 애정하는 문학 장르가 ‘시’라는 것이다. 시에는 내가 그토록 집착하는 ‘유래’나 ‘정의’ 따위는 존재하지 않지만, 나는 시가 말하는 방식을 좋아한다. 나는 말의 의미를 끈질기게 추적하면서도, 그 말 하나가 시에 들어가면 왜 그렇게 아프게 박히는지를 따질 수 없다. 그러나 시는 그런 채로도 남아 있으라고 말한다. 시가 남겨둔 빈칸들이 어려운 수수께끼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나를 오래도록 사유하게 만든다.

서로 정반대처럼 보이는 둘은, 결국 모두 질문에서 시작된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정보는 질문을 흘려보내기 위해, 시는 질문을 붙잡아두기 위해 존재한다.

-결말까지 쓰지 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