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콧털은 묻는다!
이 고생을 사서 하다니 내가 미쳤지. 요즘 나는 종일 머리가 터져라 원고를 쥐어 짜내고,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을 다른 사람들 앞에 내놓아야 하는 부담감 때문에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이다. 하지만 부서질 듯이 자판을 두드리며 고생길을 자처한 본인을 몹시 원망하다가도, 수요일 저녁이 되면 어느새 설레는 마음으로 줌미팅 화면 앞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렇듯 내 정신 분열을 일으키는 존재는 이름하여 ‘일상묘사’. 이 일상묘사는 주동자 '소신'으로부터 매주 새로운 주제가 주어지면, 그것을 바탕으로 나와 같은 몇몇 피해자들이 저마다의 뼈와 살을 갈아 넣어 수필 한 편을 써낸 뒤, 수요일마다 온라인 세상에 모여 서로의 글을 비평하는 글쓰기 모임이다. 아. 정확히 말하자면 소신은 주동자인 동시에 피해자다.
금주에 우리 앞에 던져진 화두는 ‘내가 늙어간다고 느낄 때'이다. 나는 "일상묘사를 시작한 이래 목요일부터 화요일까지 매일 그것을 느낍니다."라는 말이 가장 먼저 떠올랐지만, 제 발로 찾아와서 불평만 늘어놓고 있는 꼬락서니가 좋게 보일 리 없었기에 다른 글감을 찾기로 했다. 글을 써 내리기 직전까지 나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내게 나타나는 신체의 여러 변화를 떠올렸다. 언젠가부터 하나둘씩 보이더니 이제는 머리카락의 5분의 1을 뽑아야 겨우 사라질 정도가 된 새치와 어떤 표정을 지어도 생기 없어 보이게 만드는 이마 위 지렁이 몇 마리, 하루만 힘을 써도 사흘은 쉬어야 겨우 회복되는 저질적 체력. 무엇보다 근래 내 콧구멍에 나타난 하얀 코털 한 가닥은 개중 가장 흥미로운 변화다. 나는 화장실 거울 앞에서 처음 그것을 발견했을 때, 코딱지인 줄 알고 잡아당겼다가 곧 멜라닌 색소를 만들어낼 힘을 잃어버린 코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체념 섞인 웃음을 터뜨렸더랬다. ‘아, 이제 코털마저 늙는 건가.’ 이런 순간엔 거울 속에서 사라져 버린 이십 대의 얼굴이 그리워진다. 허나, 점점 나이들어 가는 내 모습이 썩 유쾌하지 않으면서도 도리어 이십 대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더 청춘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깨복쟁이 시절부터 나는 늘 입에 ‘왜-?’를 달고 살았다. 할머니는 그런 내게 “우리 정원이는 궁금한 게 많아서 먹고 싶은 것도 많겠다”라며 머리를 쓰다듬곤 했다. 나는 공상에 빠지는 걸 좋아했고, 머릿속을 떠도는 생각과 질문을 쫓다 보면 밥숟가락을 뜨는 것도 잊어버렸다. 어린 나에게 세상은 늘 새롭고 궁금한 것 천지였다. 그러나 미화된 추억 속 할머니가 사실은 쓰다듬이 아니라 꿀밤을 먹였던 것이었는지 어느 순간부터 나는 질문하는 것을 멈추기 시작했다. 이십 대의 대부분을 일과 살림에 몰두하며 고군분투했던 나에겐 사회가 정해둔 길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곧 성공한 삶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철밥통을 보장하는 직장, 112제곱미터 이상의 아파트, 하차감 좋은 자동차 같은 누구나 선호하는 것들이 내 삶의 좌표였고, 그것을 따라 맹목적인 뜀박질을 하다 보니 내가 진짜로 좋아하고 원하는 게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여유 따윈 없었다. 또래 친구들이 어디로 여행을 갈지, 인생의 어떤 재미를 찾으며 살지 이야기할 때, 나는 회식 자리에서 중년의 남성들과 마주 앉아 관심도 없는 주식과 부동산 시세를 걱정했다. 행여 누군가 나에게 꿈이 무엇이냐 묻기라도 할 때면, 배부른 소리를 지껄이는 한량 취급을 하며 콧방귀를 뀌어 대던 그 시절의 나는, 정말이지 애늙은이가 따로 없었다.
그렇게 십여 년이 지나, 이혼과 폐업이라는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불현듯 육지 생활을 청산하고 제주로 떠나오면서, 나는 잠시나마 멈추는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내게 비로소 텅 빈 시간이 주어졌다. 당연하게 정해져 있던 분주한 아침에 오늘은 무얼 할지 생각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찾아왔고, 책상 위에는 서류철 대신 시집이 놓일 자리가 생겼다. 무슨 복인지, 제주에서 만난 친구들은 살아남는 것이 아닌 살아가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돈 버는 길보다 마음의 방향을 먼저 말하고, 다 큰 어른이 만들기엔 다소 엉뚱한 창작 모임을 꾸린다. 때로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웃다가도, 뜻밖에 굉장히 건설적인 대화로 옮겨가기도 한다. 나는 그들과 함께하는 무용한 시간 속에서 오히려 가치 있는 것들을 발견했다. 그들과 함께 할 때 나는 다시 세상에 궁금한 것이 많아지고, 오래전 질문이 많던 어린아이로 돌아간 듯한 기분 마저 든다.
어쩌면, 일상 묘사가 매주 내게 던져주는 질문 역시 내 노화를 지연시키는 데 꽤 도움이 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문장이 어색해 수십 번 다듬고, 누군가의 말을 곱씹으며 되묻는 것은 나를 고단하게 하지만 동시에 활력을 불어넣고, 내 머리를 움직인다. 때로 철인 3종 경기를 치르는 듯한 고통이 탈진을 선사하더라도 어쩌면 그것은 평생 나이 들지 않는 근육을 키우는 유일한 운동일 것이다. 젊음이란 결국 세포의 탄력이 아니라 생각의 탄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질문을 멈추는 순간 아무리 젊은 신체를 가진 이라도 이미 노인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비록 콧구멍에 하얀 코털이 고개를 내밀었을지언정, 다시 생각하고 질문함으로써 나는 오래도록 청춘에 머무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