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할머니를 떠올리며 울고 싶다.
가난한 인간의 노년만큼 비참한 것이 또 있을까. 슬하엔 늙고 힘없는 부모에게 일말의 동정심조차 갖지 않는 비정한 자식새끼들만 줄줄이 딸려있다면 말이다.
“할머니 치매가 심해서 요양원 보내기로 했다.”
계속된 야근으로 녹초가 되어 집에 들어온 나를 불러다 앉힌 엄마의 말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할머니는 노환으로 인해 병원 신세를 지고 있긴 했지만, 며칠 전 병원에서 본 그녀의 모습은 당장 오늘내일할 사람 같지도 않았고, 대화할 때도 전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린지. 나만 여태 우리 할머니가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을 눈치 못 채고 있었단 말인가? 상황 파악이 필요했던 나는 반사적으로 끓어오르는 짜증을 삼키며 되물었다.
“갑자기 웬 요양원 타령이야? 치매 검사는 해봤어? 병원에서 뭐라는데?”
“…. 검사는 안 해봤는데, 치매야. 치매. 요즘 들어 자꾸 안 하던 짓을 한다고. 외삼촌들이며 나한테며 전화통에 불날 정도로 연락을 해대서 일을 할 수가 없다니까. 변이 안 나온다나. 지난번엔 가게에 손님들 있는데 불쑥 찾아와서 얼마나 창피했는지….”
말 같지도 않은 신종 치매 진단법을 내세우는 엄마 앞에서 내 하찮은 인내심은 버틸 여력이 없었다.
“치매는 엄마가 걸린 것 같은데? 엄마나 외삼촌들이나 그만치 할머니 등골 빼먹고 살았으면 그깟 전화 백통이라도 받아야지. 뭐 대단한 일들을 하시길래 유세를 떨어 떨긴. 요양원 같은 소리 하구 있네. 내가 모시고 살 테니 꿈도 꾸지 마셔.”
엄마와 그 형제들에게 묵혀왔던 악감정을 쏟아내고 돌아선 내 등 뒤로, 그런 비아냥쯤이야 가소롭다는 듯 엄마는 이미 외삼촌들과 얘기를 끝냈고 할머니도 요양원에 가겠다고 했다는 소리를 지껄였다. 그래, 내 생각 따위나 듣자고 불렀을 리 없지. 이 놈의 집구석은 언제나 그렇듯 잘난 어른들 말이 곧 법이다. 나는 그녀의 말이 흘러 들어올세라 방문을 굳게 닫아버렸다. 그쯤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나 역시 병든 노인을 건사해야 할 현실 앞에선 비정한 자식놈에 불과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큰소리치던 모습과 달리,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들인 내 주머니 사정으론 할머니를 먹여 살릴 수도 없었고, 직장을 때려치우고 옆을 지킬 엄두조차 나지 않았으니까.
다음 날, 나는 회사 점심시간에 짬을 내어 할머니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늘 답답하게만 느껴지던 그 좁은 동네가, 그때만큼 다행이었던 날도 없었을 것이다. 불과 며칠 사이 성성해진 할머니의 머리를 보고 나는 차마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할머니, 진짜로 요양원에 간다고 했어? 안 가고 싶으면 안 가도 돼. 내가 할머니 집에 다시 들어가 살면 되지.”
“이만큼 키워놨으면 됐지 늙어서까지 다 큰 손녀딸 수발들 일 있나. 잠깐만 가 있는 거야. 외삼촌이랑 엄마가 한 달 있다 데리러 온댔어. ”
할머니는 종전의 담담했던 대답이 무색하게도, 뒤이어 그녀 없이 내가 살아갈 앞날에 대한 가르침을 늘어놓았다. 그녀는 우리가 곧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야무진 꿈을 꾸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러나 괜한 말을 덧붙였다가 행여 할머니의 불안함에 불씨라도 지필까 싶어,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주름진 손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할머니가 요양원으로 보내지던 날, 내 직장 상사는 회사에 할 일이 산더미라며 휴일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의 아쉬운 사정이야 그와는 아무 상관 없다는 단호한 태도 앞에서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잠깐이라도 할머니의 얼굴을 보고 인사를 나누고 싶었던 나는 엄마에게 요양원으로 가는 길에 회사 주차장에 들러 달라 부탁했다. 엄마는 그러겠다고 약속했지만, 할머니를 태운 차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내 할머니는 요양원으로 보내진 지 일주일 만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간신히 숨만 붙어있는 반송장이 된 채로. 그리고 그녀는 집으로 돌아온 지 하루가 가지 못해 숨을 거뒀다.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참혹했다. 평생 긴 머리를 손질하고 가꾸기 좋아했던 그녀의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짧게 깎여있었고, 한쪽 귓바퀴는 두 쪽이 나 있었다. 요양원에서 억지로 이발을 당하다 다친 상처였다. 할머니는 요양원에서 머리카락을 잘리던 날부터 자신을 내보내달라며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엔 식음을 전폐하고 약과 주사마저 거부하다가 그 몰골이 되어서야 요양원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나는 할머니를 그 지경으로 만든 인간을 찾아 똑같은 꼴로 만들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집안 어른들은 끝까지 내게 할머니가 있던 요양원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할머니의 자식 중 그 누구도 그녀가 그런 상태로 돌아온 것에 대해 따지고 드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화가 나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할머니를 그렇게 만든 것은 결국, 망할 요양원 직원들이 아니라 우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할머니에겐 세 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녀는 일찍이 과부가 되어 홀로 자식들을 건사해야 했지만, 죽은 남편이 남겨둔 유산 덕분에 먹고 살 걱정은 없었다. 그 유산을 종잣돈 삼아서 벌인 사업도 잘되어 꽤 풍족한 삶을 누렸다. 할머니의 세 자녀는 제 어머니를 매우 사랑했다. 적어도 어머니의 지갑이 두둑했을 때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어머니가 가진 돈을 모조리 자신들의 뒤치다꺼리에 쏟아붓고, 가난하고 병든 노인이 되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그녀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큰 아들은 건달이었다. 파마머리를 늘어뜨리고 허구한 날 백바지나 빼입던 그는, 비까번쩍한 그랜저에 올라타 시골 바닥을 누비며 젊은 날을 탕진했다. 그리고 할머니에게서 받아 간 돈으로 이런저런 사업에 손을 대고 말아먹는 것으로도 모자라, 마약과 도박에 찌들어 살았다. 그는 도박 빚을 갚기 위해 노모의 집까지 팔아넘겨 버리고 도망치듯 객지로 떠났다. 운동밖에 모르던 작은 아들은 국가대표 태권도 선수가 꿈이었지만 재능은 따라주지 않았다. 그 역시 어머니에게 손을 벌려 경기도 어느 도시에 큼지막한 태권도 학원을 차렸다. 아이들 가르치는 실력은 제법이었는지 학원을 하나둘 늘려가더니 그 지역 유지 대접을 받으며 잘 먹고 잘 살았다. 할머니의 막내딸은 고향에서 양장점을 운영하다 친구 결혼식에서 만난 서울 남자를 따라 시집을 갔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이혼을 했고, 이혼녀가 되어 고향 땅을 밟기가 창피하다는 이유로 나를 할머니에게 맡겨 놓고 십 년이 넘게 다른 도시에서 살았다. 세 남매는 평생 할머니의 밥그릇을 닥닥 긁어 먹고도 모자랐는지, 그녀가 죽은 뒤에도 조의금이 가장 많이 들어올 곳에서 장례를 치르자고 했다. 그러곤 할머니가 평생을 살았던 전라도 시골 동네에서 작은 아들이 사는 경기도의 한 도시까지 할머니의 시신을 끌고 갔다. 덕분에 장례식장은 할머니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로만 가득 찼다.
나는 엄마와 외삼촌들에게 이렇게까지 해서 살림이 얼마나 나아졌는지, 할머니로부터 귀찮은 전화가 걸려 오지 않게 된 소감은 어떠한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영정사진 앞에서 눈물 흘리는 그들을 보며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실컷 울고 난 그들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편안해 보였다. 나는 그들이 부모에게 지은 잘못이 몇 방울 눈물로 씻겨 내려가선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눈물로 비는 사죄란 너무나 가벼운 형벌이었다. 내가 그들을 향해 퍼붓던 비난의 화살은 나조차 비껴갈 수 없었다. 나 역시 할머니 손에 자라며 어린 시절 내내 그녀의 보살핌을 받았다. 나이 든 할머니의 애를 받아 먹어가며 나는 이만큼이나 컸다. 그러나 선택권이 없었다는 핑계 뒤에 숨어 그녀의 가여운 처지를 얼마나 외면해 왔던가. 나는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르는 내내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릴 수 없었다. 나를 보며 독한 년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엄마의 뻔뻔한 얼굴을 보아도 화가 나지 않았다. 그저 장례식장 귀퉁이에 처박혀 앉아 이 일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생각해 내야만 했다. 만일 내가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내겠다던 집안 어른들을 악착같이 뜯어말렸더라면, 할머니가 요양원으로 가던 날 회사 따윈 때려치우고 따라나섰더라면, 아니면 할머니가 자신의 밥그릇을 먼저 챙겼더라면, 외할아버지의 유산이 자식들에게 퍼줄대로 퍼주고도 남을 만큼 많았더라면. 그랬다면 내 할머니가 그런 비참한 꼴로 죽음을 맞이할 일 따윈 없었을까. 후회와 원망만이 꼬리를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