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말랭이의 막글 모음집

이방인

내가 열일곱 살이 되던 해, 엄마가 돌아왔다. 그와 동시에, 여태껏 나를 키워준 외할머니를 떠나 엄마의 집에서 살아야 한다는 통보도 떨어졌다. 떠날 때나 돌아올 때나, 엄마는 늘 멋대로였다. 나는 그녀와의 동거가 달갑지 않았지만, 제 앞가림도 못하는 어린애는 순순히 어른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떨어져 지낸 시간만큼이나 낯설었던 엄마라는 사람과의 거리감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과연 내가 친자식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엄마는 내게 무정했고, 그에 대한 반항심이었는지 나 역시 그녀에게 살갑게 굴지 못했다. 엄마와 나는 서로에게 불편한 동거인인 채로 몇 년을 함께 살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코 앞에 대학교 진학이라는 탈출구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대학에 가기만 하면 엄마와의 불편한 동거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탈락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학교 몇 군데를 골라 1차 수시 전형 모집에 지원했다. 그리고 합격 통지서를 받던 날, 기쁨에 차 합격 소식을 전하던 내게 돌아온 엄마의 단 한 마디는 본인에게 등록금을 내 달라는 말은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인정머리 없는 인간 같으니라고. 나는 늙은 할머니의 쌈짓돈에 손을 댈 수도 없었고, 딴 살림을 차리고 사는 아버지에게 부담을 주는 전처의 자식이 되기도 싫었기에 스스로 등록금을 마련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교차로 구인 광고란을 뒤지다 익숙한 가게 이름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의 첫 돈벌이는 하교 후 6시부터 밤 11시까지, 집 근처 관광단지에 자리한 ‘마로니에’라는 라이브 카페에서 바텐더로 일하는 것이었다. 마로니에 사장은 전부터 알고 지내던 동네 삼촌이었다. 그는 성격이 괴팍하기로 소문이 난 사람이었는데 성질머리 말고도 실은 어마어마한 부잣집 아들이라느니, 약을 한다느니, 남자를 만나고 다닌다느니 하는 소문이 따라다녔다. 동네 사람들의 입은 그를 안주로 삼는 것을 참으로 좋아했다. 내가 그의 가게에서 일하게 됐다는 소식을 들은 한 친구는 “울엄마가 거기 호모 소굴이라던데….”하며 걱정 섞인 말을 건네기도 했지만, 어쩐지 흥미로운 얘깃거리를 발견한 듯한 그 아이의 눈빛에 비위가 상해 버린 나는 “그럼 잘된 거 아니야? 나한테 찝쩍댈 일은 없겠네.”라며 받아쳐 버리고 말았다. 마로니에 사장은 건장한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여성스러운 몸짓이 다소 눈에 띄긴 했지만, 어쩌다 마주치면 손에 용돈을 쥐여주는 좋은 어른이었기에 그를 둘러싼 이야기들이 내겐 그저 시끄럽게만 들릴 뿐이었다. 등록금 마련이 시급했던 나로서는 차라리 그런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속 편한 길이라고 생각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막상 일을 시작해 보니 그는 꽤 괜찮은 사장님이었다. 마로니에 안에서 그와 나의 업무는 철저하게 분담 되어 있었다. 나는 바닥 청소와 설거지, 간단한 안주나 칵테일을 만드는 일을 맡았고, 그는 주로 손님들과 대화하는 일을 했다. 간혹, 술에 취한 손님이 바 안에 서 있는 나에게 술 시중이라도 시킬라치면, 그는 “쟤 내 조칸데 미성년자라 그런 건 안 해. 등록금 벌러 온 거니까 용돈이나 많이 줘”라며 잘라 말하고는 나 대신 손님의 잔에 술을 따라주곤 했다. 나는 불편한 집에 들어앉아 있는 것보다 그의 가게에서 일하는 것이 좋았다. 내가 특히나 좋아했던 일은 단골들의 담배 심부름을 하는 것이었는데, 그들이 술에 거나하게 취해 “정원아, 디스 한 갑만 사 와라. 잔돈은 너 해”하고 만 원짜리 한 장을 내밀면 철딱서니 없는 나는 신나서 슈퍼로 향했다. 당시 담배 한 갑에 단돈 2,500원이었으니, 심부름을 하고 남은 잔돈은 꽤 짭짤한 팁이었기 때문이다.

마로니에에서 일한 지 반년쯤 되었을까. 어느 날 출근해 보니, 가게 테이블에 사장님과 낯선 손님 한 명이 앉아 있었다. 그 손님은 슬쩍 봐도 때깔 좋은 양복을 빼입은 중년의 남성이었다. 둘 사이엔 심상치 않은 기류가 맴돌았지만, 나는 애써 모른 체하며 곧장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앞치마를 주섬주섬 걸치고 나오는 내게 사장님이 다가와 담배 한 갑 사 오라며 빳빳한 지폐 한 장을 내밀었다. 출근하자마자 팁을 쥘 생각에 들뜬 나는 쪼르르 가게 밖을 나섰다. 그런데 그날따라 슈퍼에 잔돈이 없어, 아주머니가 건너 가게에 천 원짜리를 빌리러 가는 바람에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마로니에로 돌아갈 수 있었다. ‘늦었다고 혼나는 건 아니겠지?’ 발걸음을 재촉해 가게에 도착한 나를 맞이한 것은 아수라장이 돼버린 마로니에의 전경이었다. 바닥엔 깨진 술병과 유리컵의 잔해가 가득했고, 사장님은 소리를 꽥꽥 지르며 어떤 물건이든 손에 잡히는 대로 그 낯선 손님에게 집어 던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손님은 미동도 없이 앞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반쯤 열린 가게 문을 채 닫지 못하고 멈춰 있던 나를 발견한 사장님은 목소리를 가다듬고서 오늘은 그냥 집에 가라고 말했다. 놀란 가슴을 달래며 돌아선 내 손에는 미처 두고 오지 못한 디스 한 갑과 잔돈 7,500원이 쥐어져 있었다. 다음 날, 청천벽력 같은 해고 소식이 전해졌다. 해고 사유는 ‘어제 사장님이 내게 보인 모습이 부끄럽고 미안해서’였다. 나는 ‘미안한데 왜 날 자르는 걸까. 월급이나 올려주지.’라고 생각했지만, 어젯밤 본 그의 표독스러운 모습이 떠올라 말대답을 할 수 없었다. 아직 월급을 받으려면 보름이나 남았는데도 그는 내게 한 달 치 월급봉투를 건넸다. 대학 가서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과 함께.

안타깝게도 마로니에 사장의 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대학 등록금을 납부할 날이 가까워 엄마에게 맡겨둔 월급 봉투를 돌려받으려 했을 때, 엄마는 돈 대신 이미 다 써버렸다는 말만 내놓았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녀를 믿고 봉투를 내밀었던 것인지, 나는 스스로를 탓하며 대학 진학 대신 취업 전선에 뛰어들 수 밖에 없었다. 몇 번의 계절이 지나, 마로니에가 있던 자리엔 분위기 좋은 양식집이 들어섰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동네 어디에서도 마로니에 사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가 고향으로 돌아갔다느니,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느니 하는 소문만이 그의 빈 자리를 채울 뿐이었다. 그날 마로니에를 찾아왔던 중년의 남자는 대체 누구였을까? 사장님의 아버지? 애인? 아니면 그냥 무례한 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