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짓는 것도 일
신선놀음이나 하겠다며 제주도로 떠나왔건만, 잡다한 일이 파도처럼 몰려와 자꾸만 내 등을 떠민다.
나의 애인 형선은 흰 덩어리에 눈만 달린 캐릭터를 판다. 인터넷 세상에서 시작한 그녀의 캐릭터 사업은 제법 인기를 얻어 간간이 백화점이나 박람회에 불려 가기도 하는데, 오만 일을 혼자 맡아 했던 형선은 갈피를 못 잡고 허둥대기 일쑤였다. 그런 그녀 옆에서 마침 반백수나 다름없던 나는 영수증 챙기기 같은 자잘한 일을 거들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나의 잡무는 계약서 검토와 행사 운영, 물류와 인력 섭외에까지 발을 들여놓게 됐다. 지난 8월에는 육지에서 여러 행사를 치러야 하는 와중에 이미 제주에서 운영하던 엽서 가게 이사마저 겹치면서, 한동안은 일이 나를 끌고 가는 건지 내가 일을 끌고 가는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형선은 과거에 동업하던 자들과 법적 분쟁에 휘말려 있다. 성질 같아선 사기꾼 그 녀석들을 엽총으로 쏴 죽이고 이 복잡한 사기 사건을 단숨에 살인 사건으로 종결시키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법의 테두리 안에 살아가는 선량한 시민이 아니던가. 별수 없이, 문서 알레르기가 있는 형선을 대신해 변호사에게 보낼 증거자료와 사건 개요를 수십 번 읽고 다듬는다. 왼종일 그것들과 씨름하다 보면, 내 얘기를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아도 원고, 피고, 청구취지 같은 딱딱한 글자만이 머릿속을 떠돈다.
나는 지난 몇 달간 쏟아지는 일을 쳐내며 나름의 성과를 얻기도 했지만, 정작 어떤 것도 해내지 못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능력 밖의 일들을 손에 쥐었기 때문인지, 하고픈 일보다 해야 할 일을 앞세워 버릇해서인지, 아니면 내가 상당히 비관적인 인간으로 태어난 탓인지 알 수 없다. 내 일이 아닌 애인의 일에만 매달린 결과일까. 잘나가는 애인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쪼다의 열등감에서 비롯된 건지도 모르겠다. 머리를 굴려보면 갖가지 원인이 떠오르지만, 무엇도 지금의 나를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한다. 막막함이 밀려온다. 안개 낀 새벽, 차 안에서 시동을 켜둔 채 공회전만 돌리고 있는 꼴이랄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가속 판을 밟지 못하고 애꿎은 연료만 축내고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안개 속 어딘가에 목적지인지 신기루인지 모를 아주 어정쩡한 불빛이 아른거려 시동을 끌 수도 없다.
“할 일이 많은데, 할 일이 없어요.” 오랜만에 마주한 수화기 너머 한이에게 나는 밑도 끝도 없이 푸념을 늘어놓았다. 제주 구도심에서 시와 와인을 파는 여한이님은 백 년 묵은 나무 같은 사람이다. 거센 바람이 불어도 쉽게 흔들리지 않고, 그늘을 드리워 옆에 선 사람에게 쉴 자리를 내주는. 제 살기 바빠 감감무소식이던 내가 어느 날 불쑥 전화를 걸어 근심을 한 보따리 풀어놓아도, 한이는 언제나처럼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일이 너무 많아서, 소송이 이렇게나 복잡해서’ 내가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 나니, 한이 역시 요즘 부쩍 허약해진 몸이라든가, 가게 살림의 자잘한 걱정들을 꺼내 놓는다. 누군가에겐 고민거리가 아닌 사소한 문제부터 행여 내 모습이 초라해 보일까 감춰왔던 이야기까지, 그녀와 나는 서로에게 딱 맞는 답을 줄 수 없지만 그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저절로 문제가 해결되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전화해 줘서 고마워.” 한참의 푸념 끝에서 나의 한숨 동지 여한이는 언제나 같은 인사를 남긴다.
수화기가 내려질 순간만을 호시탐탐 노리던 책상 위 일더미들을 외면한 채, 나는 그대로 거실 소파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가능한 한 가장 불량한 자세로 담배 한까치를 꼬나물고선 허공에다 연신 뿌연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천장 끝까지 솟구쳤다 이내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녀석을 바라보고 있자니, 형체도 없이 흩어지는 미립자 따위가 몹시도 부러웠다. 허나 세상 고난을 혼자 겪은 것 마냥 청승을 떨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워 금세 고개를 저었다. 머릿속에 들어찬 허튼 생각일랑 집어치우고 당장에 쌓인 일들을 불러내려 애썼다. 그러다 문득 거실 벽 한 칸을 차지하고 있는 책장이 시야로 들어왔다. 거기엔 언젠가부터 좀처럼 펼쳐지지 않는 책들이 가득했다. 나는 몸을 일으킬 여지도 없이 쏟아질 듯 빼곡하게 들어선 책등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만남에서 동반까지, 청춘의 문장들, 정확한 사랑의 실험, 나 개 있음에 감사하오…. 마치 내 삶의 방치된 목록을 읽어 내려가는 듯했다. 내년엔 저걸 열어 볼 수 있을까. 나는 한참 동안 소파와 한 몸인 채로 별별 일을 다 끌어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