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말랭이의 막글 모음집

막 글(raw writing)

약속한 날짜가 다 되었다. 정해진 주제에 대해 글 한 자 써 놓은 것이 없으니 조바심이 든다. 골똘하려니까 오히려 멍해진다. 무엇을 어떻게 쓸지 생각만 하다가 시간이 다 갔다. 사실은 그 생각을 진득허니 하지도 않았다. 또 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구나. 나는 언제쯤 이 짓을 안 하고 살 건가? 도대체 뭐라고 써야 하나? 새벽 내내 전두엽을 혹사하며 안방에서 화장실로 그리고 거실로, 책상에 앉았다가 침대에 드러누웠다가, 괜히 집 안 한 바퀴 돌고 창밖을 내다봤다가, 아주 발광을 했다. 그러한들 한자리 끄적이지도 못하고 생각은 산란하기만 한 채 결국 아침 해가 떴다. 잠을 설치니 안개가 낀 것처럼 눈앞이 뿌옇다. 아, 며칠 전 평화로에 안개비가 그득했는데 운전하기가 얼마나 사납던지. 가시거리가 십메다도 안 됐던 것 같다. 한 치 앞도 보이질 않으니 40분이면 갈 수 있는 길에서 두 배나 시간을 써야 했다.

벌써 일곱 시다. 이젠 미룰 시간도 없는데 애석하다. 들썩이는 엉덩이를 간신히 책상 앞에 앉혀 놓고는 천장 위 뱅뱅 돌아가는 실링팬에 시선을 뺏긴다. 얼마 전 시장에서 데려온 무늬 단풍의 이파리가 바람에 살랑살랑 나부낀다. 한동안 존재조차 잊고 있던 녀석을 흠모하는 눈으로 바라본다. 아무렴, 내 머릿속 생각들도 저 한가로운 풀때기처럼 소올솔 바람이나 쐬고 싶은 모양이다. 마감에 가까운 글을 쓰기 위해 품었던 결의가 또다시 어그러진다. 누군가 생각이 어지러우면 명상을 하라고 했던가. 산책도 좋다는 얘길 들었다. 그렇지만 지금 내겐 한숨 푹 자는 게 알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밖에서 정적을 깨는 고함이 난다. 격렬한 어조의 싸움소리. 창밖을 빼꼼히 내다보니, 건너편 구영필름 사장님이 전화기를 붙들고 떠드는 소리다. 이 집에 이사 온 뒤로 벌써 몇 번째 보는 광경인지 모르겠다. 그는 허공을 향해 삿대질하며 따져 묻는 소리를 뱉는다. 욕지거리도 마구 섞는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으로는 바람난 부인 때문에 의처증이 생겼다나. 언제부턴가 툭하면 이 사람 저 사람 시비를 걸고 다닌단다. 아침 댓바람부터 단단히 부아가 난 아저씨는 오늘도 남의 시선은 안중에 없이 악다구니를 써댄다. 축 늘어진 메리야스 하나만 걸친 채로. 저러고 나면 좀 낫나? 숨죽이며 듣고 있자니 나도 따라서 소리를 지르고 싶다. 그렇게 해서 글이라도 술술 풀어진다면 목이 쉬도록 질러도 좋겠다.

딸깍 딸깍 딸깍 딸깍.

혹여 묵혀둔 글이라도 있을까, 소재거리 하나 얻을까 싶어 내 블로그 게시판을 훑어본다. 무의미한 짓이다.

아, 얼마 전 내 블로그에 작은 사건 하나가 있었다. 방문자 목록에서 타국 사람을 발견한 것이다. 어쩌다 한번 흘러 들어온 줄 알았는데 그 뒤로도 종종 같은 이의 방문 기록이 남았다. 신기한 마음에 그 사람 흔적을 따라가 보았더니 그의 블로그에 내 글 한 편이 소개되어 있었다. 그러나 반가운 마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나는 그가 번역해 놓은 블로그 명을 보고 주춤했다.

A collection of Gogumallaengi's last words

Last Word? 마지막 말이라니. 내 블로그 ‘고구말랭이의 막 글 모음집’에서 ‘막 글’은 마지막 글이 아니라 막 써재낀, 막돼먹은 글이란 말이다. 동음이의어를 이해하지 못한 번역기 때문에 졸지에 유언장 비스무레한 느낌이 되긴 했지만, 기분은 좋았으니 된 것인가. 어찌 되었든 지구 반대편 일억 만 리쯤 떨어진 곳에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있다는 것은 꽤 짜릿한 경험이었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유명 작가라도 된 듯한 기분을 맛본 나는 요즘 별생각을 다 한다. 오늘도 들어왔을까. 새로운 글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뜻이 제대로 전달되게끔 영어로 번역한 글도 같이 올려볼까. 외국인 독자가 많아지면 어쩌지. 이제라도 영어 회화를 배워야 하나. 이러다 세계 진출하는 거 아니야?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우주를 비행하다가 부끄러움에 몸서리치기 일쑤다. 조금 챙피하긴 하지만 근래엔 이 터무니없는 상상이나마 글쓰기를 계속할 동기로 삼고 있다.

사실 나는 세계 진출이라는 둥 하는, 그런 거창한 뜻을 품고 살아온 인간은 아니다. 세계 진출은커녕 국내 진출도 못 하고 있는 처지인 데다, 제 수준을 모르지 않기에 딱히 이름을 날리고 싶다는 욕망도 없다. 이 말을 들은 호연지님은 '과연 그럴까요…?'라며 되물었다. 아니, 어쩌면 욕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버리려고 한다는 것이 더 맞겠다. 나는 친구들을 보면 주눅이 든다. 그들은 꾸준하고 부지런하고 재능 있는 창작자들이다. 그에 비하면 나는…. 글쎄, 간헐적이고 게으르고 재능이 부족한 창작자라고나 해야 할까. 가슴에 품은 욕망을 실현하지 못 했을 때 겪을 실망감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스스로 그 욕망을 부정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죽기 전에 근사한 문장 하나쯤 써 보고 싶긴 하다. 지금이야 두서없이 써대고 있지만, 훗날 누군가 내가 쓴 책을 펼쳐 볼 날이 온다면 그 안에 읽을 만한 글이 있었으면 좋겠다. 좋은 글이라는 칭찬이 덧붙으면 더 좋고. 그렇다면 나는 확실히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나저나 오늘은 뭘 써야 한담.

“에이 시팔... 말이야.. 지가 ...”

구영필름 사장님이 가게 앞에 앉아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린다. 소리가 약해진 걸 보니 분이 좀 풀린 모양이다. 장맛비 냄새가 밴 축축한 바람이 플라스틱 의자에 퍼져 앉은 아저씨와 내 사이를 훑고 지나간다.